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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의 전투

세계의 전투 이야기 11. 탈라스 전투

by 뉴스관리자 2022. 3. 9.

바다가보이는풍경

중국 왕조에 대항하는 제국. 서기 751 7 당군과 압바스군은 탈라스강 유역에서 만나 중앙아시아의 시르다리아 지역을 지배하기 위해 싸웠습니다. 중국 소식통에 따르면 며칠간의 교착상태 이후 당과 동맹관계에 있던 카를루크 터키인은 압바스 아랍인으로 망명해 세력균형을 무너뜨리고 당의 패주를 초래했습니다. 패배는 당의 서쪽으로 확장의 끝을 보여줬고, 이후 400년간 무슬림 아랍인이 트란스키시아나를 지배하게 됐습니다. 지역의 통제는 실크로드에 있었기 때문에 압바스 왕조에 경제적으로 유익했습니다. 전쟁의 여파로 붙잡힌 중국인 포로가 서아시아에 제지 기술을 전파했다고 합니다. 탈라스 전투에 참가한 전투원 수는 확실치 않습니다. 중국의 추정에 따르면 압바스군은 20만명의 군인으로 구성돼 있으며 티베트 동맹군도 포함돼 있습니다. 반면 아랍의 기록에 따르면 중국의 연합군은 10 명으로 나타났습니다. 그러나 중국 소식통들은 당인 1 명과 칼루크 용병 2 명의 연합군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진영의 전투에 대한 최초의 서술인 통디언(서기 801) 3만명이 사망했음을 시사했고, 당주(서기 945) 전투로 2만명이 사망한 것으로 집계했습니다. 카밀 탈리프(서기 1231) 전투 자체에 대한 아랍어의 최초 기술은 5만명이 사망하고 2만명이 포로가 되었음을 시사하고 있습니다. 751 7 무슬림군은 탈라스강 기슭에서 당나라 중공군(당나라 중국군과 칼루크 용병 연합군) 전투에 참가했습니다. 당군은 참패한 당의 패배는 카를크 용병의 망명과 중국을 지지했던 페르가나 동맹국의 후퇴에 따른 것이었습니다. 당군의 3분의 2 차지하는 카를루크 용병은 전투 아바스로 망명했고, 카를루크군은 접근해 당군을 공격했고, 주요 압바스군은 전선으로 공격했습니다. 당군은 진지를 지키지 못했고, 당군의 사령관 가오젠지는 패배가 임박했음을 인식하고 이시례의 도움으로 당군 일부와 함께 탈출했습니다. 1만여 명의 당군 2 명만이 탈라스에서 중앙아시아 영토로 돌아올 있었습니다. 전투에서 패했음에도 씨는 단수지의 질책을 받고 아랍군에 손실을 끼쳤습니다. 전투의 중요성을 선언한 초기 역사학자 중에는 러시아 역사학자 바실리 바르톨드가 있었습니다. 그에 따르면 초기 아랍 역사학자들은 당시 서아시아에서 있었던 일들에 대한 이야기에 몰두해 있었는데 전투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투르키스탄의 역사에서 전투는 매우 중요합니다. 문명 중국과 무슬림 어느 쪽이 투르키스탄 영토에서 우위를 점해야 할지를 결정했습니다. 데니스 시노르 교수는 서카가나트가 파괴되고 무슬림이 최대의 적을 몰아낸 중앙아시아에서 중국의 패권을 끝낸 것은 서튀르크 카가나트의 내정간섭이지 중국의 존재를 끝낸 것은 탈라스 싸움이 아니다고 말했습니다. 중국의 무슬림 역사학자 백상의(白尙義) 나아가 타라가 발생하자 당나라도 칭하이성 시바시에서 쑤엽으로 군대를 파견하여 중국의 투르게슈에 대한 통제를 강화했다고 썼습니다. 쇼위에 따르면 중국의 중앙아시아 진출은 탈라스 전투 이후에도 멈추지 않았습니다. 가오젠지에서 왕정건을 거쳐 자리를 내준 펑창칭 중국 사령관은 사실상 카슈미르 지역을 석권하며 2 만에 길기트를 함락시켰습니다. 게다가 타슈켄트는 753년에 가신의 지위를 회복해, 당이 통치자에게 칭호를 주었습니다. 그는 파미르 산맥 서쪽에 있는 중국인의 영향력도 전투 결과 결코 수그러들지 않았다고 주장했습니다. 사마르칸트와 같은 무슬림 지배하의 중앙아시아 국가들은 당에 아랍인에 대한 지원을 계속 요청했고, 754 서투르키스탄 왕국은 다시 당에 아랍인을 공격하는 탄원서를 보냈고, 당은 수십 년간 같은 요청을 계속 거부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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